"진심으로 과학을 사랑하는 옆집 아저씨"
고려대학교 화학과 김준곤 교수
벌써 릴레이 인터뷰 다섯 번째 시간이다. 대학원 n년간 전공분야 교수님만 뵙고 어려운 이야기만 나누다가 이렇게 다양한 전공의 교수님을 뵙고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신기하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인터뷰가 되고 있는지도 정말 궁금하다. 오늘은 고려대학교 화학과에 재직 중인 김준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김준곤 교수님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부를 마치고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NASA 산하의 Jet Propulsion Laboratory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내고 POSTECH을 거쳐 고려대에서 활발히 분석화학 분야의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금부터 김준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교수님. 릴레이 인터뷰는 다음 인터뷰 대상을 추천하는 포맷인데요. 제가 김정곤 교수님께 들으니 직접 뵌 적은 없으시다고요?
“네, 안녕하세요. 말씀대로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어요. 아이러니하죠. 그렇지만 공동연구는 같이 진행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인연은 KAIST 김형준 교수의 소개로 시작되었네요. 김형준 교수는 저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에요. 제가 국내에서 학부나 대학원을 나오지 않아 국내 연구자들과 친분이 적었는데요. 제가 포닥 마치고 한국에서 학회를 갔는데 어색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김형준 교수와 어울리며 김정곤 교수님을 소개받았어요. 처음에는 SNS에서 이야기를 하며 지냈고, 서로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고 있으니 연구도 논의하다가 공동연구까지 하게 되었네요.”
SNS는 어떤 것을 하세요? 트위터일까요?
“아뇨ㅎㅎ. 저는 페이스북을 합니다. 저희 세대가 옛날 싸이월드 시절 소통하던 방식에 익숙한데 그게 페이스북에도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 탐방 가겠습니다 교수님ㅎㅎ. 학부과정도 외국에서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외국에 가신 건가요?
“저는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갔습니다. 사실 고려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거든요. 대학을 다니다 보니 군대 갈 나이가 되었고, 주변 친구들이 다 군대를 갔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군대에 갔어요. 입대 전부터 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아쉬움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대 후에 ‘미국에 한 번 나가보자’하고 떠났습니다. 원래는 어학연수 후에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또 가보니 거기서 공부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미국에서 학부과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창한 계획이 있었거나 하진 않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선택했어요. 그런데 판단은 혼자 내리지 않고 항상 아버지와 상의를 했습니다. 지금 저희 연구실 학생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도 부모님께 여쭤보라고 말해줍니다. 선택은 본인이 하겠지만 철저하게 너의 편에서 너의 입장을 대변하여 조언해 주실 분은 부모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면 교수님은 문이과 선택할 때도 부모님과 상의하셔서 이과를 선택하셨나요?
“그건 아니에요. 저희 집안에서 저만 이과 출신입니다. 솔직히 저도 문과 체질이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발표하는 것도 좋아하고 수학보다 국어와 영어를 더 좋아했고요. 그런데 왜 이과를 지원했냐 한다면 별생각이 없었다는 생각밖에 없네요. 의사나 과학자가 되겠다든지 그런 꿈이 있던 것도 아니거든요. 고등학교 1,2학년이 무슨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웃음).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만 고민을 했겠죠. 근데 저는 그때 당연하다는 듯이 이과를 선택했네요. 진지한 고민을 하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선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사실 국어와 영어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수학을 못하진 않았거든요.”
화학은 어떻게 전공으로 선택하시게 되었을까요?
“미국에서 대학에 가서 처음에는 의대를 가볼 생각이 조금 있었어요. 미국에서의 의대 진학은 우리나라 과정과 조금 다릅니다. 대학교 4년을 학부 전공으로 마친 후에 전문대학원 과정으로 가는 방식인데요. 의대에 가려면 일단 이과를 계속해야 되니까 화학 과목을 몇 개 수강했는데 의외로 일반 화학 과목을 잘하더라고요. 의외로 잘한다라는 거는 반에서 1등을 했다는 거겠죠ㅎㅎ. 그때 좀 놀랐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거 해야겠다는 생각에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처음에 의대를 생각했던 것도 사명감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의대를 준비하던 친구들이었거든요. 화학 과목에서 성적이 잘 나오니까 기분도 좋았고, 다른 과목에서 영어를 못한다고 구박을 받다가 화학 수업에서는 제가 중심이 되더라고요. 이방인으로서 이질감을 안 느끼게 해주는 과목이 화학이었기도 하고요. 결과적으로 화학을 선택하고 3학년 때 인턴을 하며 그 이후의 인생이 결정되었습니다.”
3학년 인턴 시절 어떤 일이 있었나요?
“3학년 여름방학 전에 외부 인턴을 해보려고 학교에 열리는 잡 페어(job fair)에 이력서를 한 40장 출력해갔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다 뿌리자는 생각에 친구랑 40장을 다 제출했습니다. 그중에는 CIA나 FBI, 담배 회사인 말보로도 있었어요. 그렇게 지원했던 40군데 중에 5군데 정도에서 인터뷰 기회를 얻었어요. 그중 한 곳이 NASA 산하의 JPL이라는 연구소더라고요. NASA라고 하길래 폼 나서 일단 지원했는데 합격해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죠. 거기서 중요한 사람 세 명을 만났습니다. 작은 보스, 중간 보스, 큰 보스라고 제가 얘기하는 분들이에요. 인턴이 끝나갈 때쯤 큰 보스가 저에게 앞으로 진로에 대해 묻더라고요. 화학을 잘하는 사람은 화학자가 되는 거라는 말을 하며 네 자리를 열어둘 테니 학부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큰 보스는 물리학자였어요(웃음). 그렇게 인턴십을 통해 과학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JPL에서 할 연구 분야로 분석화학을 선택하셨나 봐요.
“외부 인턴 말고도 학부 참여 연구로 분광학 연구실에 가서 연구를 했어요. 학교에서 인턴을 하겠다는 생각을 좀 늦게 해서 이미 연구실 인턴 자리들이 다 찼더라고요. 갈 데가 없던 와중에 새로운 교수님이 오신다 해서 그 방 1호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때 실험실 셋업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고장난 UV-vis 장비도 고쳤고요. UV-vis 측정 결과가 종이로 지이익- 지이익- 하면서 출력되는 옛날 장비였는데 그걸 디지털화하라고 하셔서 Visual C++로 코드를 열심히 짰어요. 코딩이 처음이라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그 작업만 했네요. 컴퓨터 부품을 모아다가 컴퓨터 조립도 했고요. 어떻게 보면 화학이라기보단 인스트루멘테이션(instrumentation)의 분야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 후에 졸업하고 JPL 가서도 비슷한 연구를 했어요. 장비를 만드는 걸 했거든요.”
인턴생활에서 코딩이나 장비 수리, 캐드 같은 낯선 주제를 접하시면서 불만이 생기진 않으셨어요?
“돈을 주니까요.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데요. 2주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샐러리가 통장에 입금되는데 얼마나 기뻐요. JPL 선택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제가 학부 때 한국은 IMF 시절이어서 돈을 여유롭게 보내달라고 하기에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때 자취방에서 친구들이랑 이런 계산을 한 적이 있어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급이 8불~10불이었거든요. 그런데 장학금을 타면 학비와 생활비가 나오더라고요. 훨씬 남는 장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친구들이랑 투룸 아파트에 다섯 명이 모여 살기도 하며 절약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죠. 통장의 잔고가 성적보다 걱정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불평 없이 주어지는 과제를 열심히 해결했습니다. 아직도 얘기하는 게 저희 연구는 입금 연구였어요.”
학부 졸업 후 JPL에서 몇 년간 근무하시고 대학원에 진학하신 건가요?
“JPL에 가서 1년 동안 미시간에 위치한 다양한 대학들과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때 장비 시연도 하고 발표도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섭섭함을 처음 느꼈거든요. 내가 디자인하고, 장비를 만들고, 깎고, 오퍼레이팅도 하는데 막상 발표를 할 때 내 의견은 별로 어필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박사학위라는 게 무엇일까 고민을 하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이끄는 라이선스가 박사라는데까지 이르더라고요. 그 후에 또 미시간에 공동 연구하는 그룹의 박사 과정생과 함께 파견을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박사 과정생과 저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느꼈어요. 그 친구는 박사 candidate이고 저는 그냥 테크니컬 스태프니까 그랬겠죠. 그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중간 보스가 저를 불러서 지금 만족하냐고 물으셨어요.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고, 급여도 들어오니까 만족한다고 대답했죠. 근데 그때 되게 혼났어요. 지금 만족할 수 있지만 커리어를 위해서 대학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며 대학원을 추천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GRE 준비도 해서 JPL이 있는 칼텍에만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이 되었어요. 미국에는 학연 제도가 있진 않거든요. 그런데 큰 보스가 제 지도 교수님께 연구비를 지원할 테니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제안해서 학연생처럼 실험실 생활도 하고 수업도 듣는 바쁜 생활을 했습니다.”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내셨네요, 교수님. 교수로 임용이 되셔서 한국 오실 때 미국에서 해온 장비 연구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아뇨, 고민을 했는데 instrumentation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POSTECH에 임용되어 한국에 들어왔는데요. 초반에 많은 정착비를 받았습니다. 거의 미국에 버금가는 테뉴어 제도라는 게 시작이 될 때여서 실적에 대한 압박감도 함께 받았지만요. 그래서 instrumentation을 하면 논문이 잘 나오지 않고, 대중적인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어려우니 일단은 어렵게 장비를 만들지 말고 사서 쓰자고 전략을 바꿨어요. 직접 개발하는 것보다 활용을 하는 쪽으로 갔던 것이죠. 사실 그 당시에 이미 제가 전문으로 했던 이온이동도 질량분석기라는 장비는 상업적으로 생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산업체로 기술이 넘어가서 활발하게 상업화가 되어 있는 기술은 대학이 경쟁하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학과 산업체는 자본이나 목적이 다르고요. 제일 큰 차이는 인력이죠. 대학은 연구를 통해서 교육을 수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훌륭한 업적도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원생은 아직 아마추어에요. 결국 대학이 산업체와 협력은 할 수 있지만 경쟁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개발된 장비를 활용할 연구 분야를 찾게 됩니다.
처음 잡았던 연구 대상이 intrinsically disordered protein(IDP)인데요. IDP는 구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을 텐데, 주변 환경에 의한 IDP의 구조변화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또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포스터에서 김기문 교수님께서 연구하시던 쿠커비투릴(cucurbituril)을 보게 됐는데 카보닐 그룹이 있어 분자 바깥쪽은 극성을 띄는데 안쪽은 소수성을 가지고 있다더라고요. 그런데 구조가 안정적이어서 수용액 내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분자 간의 복잡한 작용을 이해하는데 좋은 모델로 쓸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쿠커비투릴 연구까지 하게 되었고, 연구방향이 좀 더 다양해졌습니다. ”
다양한 연구로 바쁘실 텐데 과학 대중화 활동도 활발히 하시는 중이죠? 주기율표 영상은 저도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지난 몇 년간 개인적으로 연구나 과학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굉장히 fundamental 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 연구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의 만족을 위하는 것이 전부인지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동경하는 선배님이신 고려대 이상원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기초연구 성과가 실용화되어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우리가 근본적인 부분을 밝혀냈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과학 연구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기초 연구 성과가 실용화 되는 것도 돕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듣고 보니 정말 맞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면서 이상원 교수님과 공동연구도 하고 학회 활동도 같이 하는데, 2019년 주기율표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화학회에서 제작하는 영상을 제작하자고 끌어들이셔서 기획이나 캐릭터 디자인도 했고요. 내친김에 자연계열 학생들한테 정보도 주고 잔소리도 좀 할 겸 책도 출판했습니다. 이익을 보기 어렵다고 해도 그냥 저는 계속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지난 그룹 미팅 할 때 했던 얘기인데요. 우리는 연구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연구비가 혈세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학생이건 교수건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혈세를 받아서 연구를 하고 있는 건데 연구 내용을 혈세를 내는 국민들과 공유를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이유로 과학 대중화 사업에도 관심을 놓지 않고 있어요. 부가적으로 과학 대중화 사업을 하면서 연구실 홍보도 되더라고요. 대학원생 지원자가 많이 늘었어요, 정말로. ”
대중화 사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과학자가 하는 일은 앞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중요성이 전달되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어요. 대학은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보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미래를 바라보고 연구를 해야 하고, 어떤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의 보고가 되어야 합니다. 창고에 식료품, 의약품 등이 있어야 필요할 때 쓸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없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큰 문제를 온전히 겪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알고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인재들이 과학계로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과학자가 영웅인 나라가 되게 하는데 일조하는게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ㅎㅎ.”
인터뷰 도중 뜬금없이 질문을 했다. “교수님, 혹시 노래 잘하시나요? 혹은 좋아하시나요?” 김준곤 교수님이 곤란하실 듯하여 인터뷰에 포함하지 않은 내용인데, 질문의 이유는 간단했다. 교수님 목소리가 정말 좋아서!
긴장 속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마무리되었다.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이 지대한 과학 전공자로서 인터뷰 마지막 부분의 교수님 꿈을 응원한다. 사람들은 과학을 어렵게 생각한다. 물론 어렵다. 그렇지만 분명 재밌는 부분도 있는데, 어렵다더라 들은 이야기로 과학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국민이 모두 과학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과학에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오늘의 TMI로 필자의 MBTI는 ENTP이다. 본래 즉흥적인 성향으로 큰 고민을 하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편이다. 실천력이 좋다는 게 장점이지만 생각이 짧아 사서 고생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게 단점이다. 내 행동의 밑바탕이 되는 나의 철학은 무엇이고, 어떤 철학으로부터 가치관을 정립하여, 어떤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을지 이제라도 고민해 보려 한다. 하나하나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견고히 쌓는 것, 받은 것을 잊지 않는 책임감과 바라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결단이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킴을 배웠다.
다음 릴레이 인터뷰에서는 경북대학교 화학과 김성환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혹시 김준곤 교수님이 기획, 총책임, 원고, 자료, 과학자문,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 제작된 주기율표와 원소 영상을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링크를 걸어둔다.
CRIC에서 김준곤 교수님의 연구활동 자세히 보기 >>